즐겁게 버튼을 눌렀다. 십오 년 넘게 다시 보고 싶었던 작품이 제대로 다듬어져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 화 첫 컷에서 이미 뭔가 이상했다. 눈이 부신다는 말이 아니다. 너무 편해서 이상했다. 보기 편하다는 것이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문제는 배경이었다. 예전 판본에서 이 작품의 배경은 거칠거칠했다. 붓자국이 보이고 종이의 거침이 보이고 그 위에 입자가 앉아 있었다. 새 판본에서는 그 입자를 지우는 과정에서 붓자국까지 같이 밀려나갔다. 벽이 밀랍처럼 매끈해졌고, 매끈해지자 멀어졌다. 질감이 없어진 배경은 그럼으로써 그냥 배경이 되었다. 인물이 그 안에 서 있지 않고 그 앞에 붙어 있게 됐다.
노이즈를 지우면 무엇이 함께 지워지는가
필름에는 원래 잔모리가 있다. 이것은 결함이기도 하고 재료이기도 하다. 잔모리가 화면 전역에 골고루 깔려 있으면 색면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잡티를 지우는 도구는 어느 것이 잔모리이고 어느 것이 그림인지 완벽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연필 자국을 잔모리로 오해해 함께 지운다. 지워진 자리에는 매끈한 면이 남는다. 매끈함이 지나치면 눈은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 사진처럼 보기 시작한다.
화면비 문제는 더 솔직하게 잡아낸다. 옛 비율로 만들어진 화면을 넓은 비율에 맞추면서 위아래를 잘라낸 판본이 있다. 화면이 시원해지니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반긴다. 그런데 잘려나간 것은 허공이 아니다. 인물 위에 놓여 있던 여백이다. 그 여백이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천장이 높게 보이던 방이 갑자기 답답해지고, 인물이 쓸쓸해 보이도록 잡은 구도가 사람 모이는 장면처럼 바뀐다. 한 컷의 의미가 여백 한 줄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원본을 다듬는 것과 원본을 고쳐 쓰는 것 사이에는 아주 얇은 경계가 있다. 문제는 그 경계를 넘었는지를 원본을 기억하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고마웠던 것들
사실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열 번 넘게 보면서도 몰랐던 것을 여럿 발견했다. 주인공 방 책장에 어떤 책이 거꾸로 꽂혀 있는지, 그 방 창틀에 화분이 몇 개인지. 예전에는 그냥 질척한 색덩어리였다. 이번에는 형태가 읽혔다. 공기가 차가운 회차에서 인물의 입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하게 새 판본이 준 선물이다.
눈동자도 달랐다. 예전 판본에서 인물의 눈은 거의 검은 점이었는데, 새 판본에서는 안에 옅은 하이라이트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무너지는 회차에서 그 하이라이트가 사라진다. 절망하는 인물의 눈에서 반짝이는 점을 버리는 것은 오래된 방법이지만, 예전 화면에서는 읽히지 않았다. 지웠는지 안 지웠는지 자신이 없어서 지나갔다. 지금은 보인다. 이 발견 하나만으로 새 판본은 자기 몸값을 했다.
그래서 팬들의 판본 논쟁은 끝이 없다. 어느 판본이 정본이냐는 질문에 다들 다른 답을 내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대부분 자기가 처음 본 판본을 고르고 있다. 나도 다를 것 없다. 화질과 무관하게, 처음 본 판본은 기억 속에서 이미 원본이 되어 있다. 원본이 둘이면 한쪽은 가짜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다.
그러니 지금 나는 두 판본을 다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권할 때는 새 판본을 권한다. 눈을 자세히 보고 싶을 때도 새 판본을 편다. 그런데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한 화를 틀고 싶을 때는 여전히 예전 판본을 연다. 거기에는 내가 입자와 함께 보낸 십오 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리마스터는 작품을 닦아줄 수 있지만 내 기억을 닦아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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